작성일 : 15-03-22 12:41
실제 한자의 '一'자는 옆으로 드러누워 있고 아라비아 숫자 ‘1’은 똑바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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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한자의 '一'자는 옆으로 드러누워 있고 아라비아 숫자 ‘1’은 똑바로 서 있다.
즉 하나는 수평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이다. 똑같은 '하나'를 의미하지만 그 표현방법이 동양은 '하나'를 수평적으로 표시하고 서양은 '수직'으로 표현하고 있다. '一'자와 '1'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차이가 바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동양의 여유로움과 한가로움 속에서 펼치는 여백의 논리와 서양의 촉급함과 직선적, 단도직입적 사고 논리를 극명하게 대조시켜주는 전형적인 보기라고 볼 수 있다.
동양의 '一'자가 수평으로 직선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약간 굽어져 있다. 그 말은 외형상으로는 똑바른 수평선처럼 되어 있지만 굽이굽이 돌아서 가거나 돌고 도는 원형적 사고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동양은 예로부터 ‘천천히 가 아름답다’를 삶의 소중한 미덕으로 간주해왔다. 주변의 대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는 면이 '一'자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옆으로 천천히 쓰는 '一'자와는 달리 아라비아 '1'자에는 왠지 모르게 빨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다'라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빨리 빨리 가 아름답다’라는 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는 빨리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一'자를 쓰면서 몸에 밴 여유로움과 한가함을 잊어버리고 모두가 속도전에 뛰어 들어 빨리 빨리 뛰어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빠른 것만이 시대를 앞서간다’라는 광고문구가 시사하듯이 빠른 속도는 좋은 것이고 느린 여유로움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의 사고가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그래서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도 점차 빨라진다. 광고도 빠름 빠름을 강조하고 삶의 속도도 빠름만이 미덕으로 칭송되고 있다. 일도 더 빨리 처리해야 되고 효율과 능률만이 지향해야 될 유일한 가치관인 것처럼 세상이 너무 시끄럽게 흘러가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아무리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을 제외한 우주 삼라만상은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기 자신의 성장속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그 속전에 뛰어 들고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조금 지나 신록의 계절을 맞아 녹음이 우거지고 다시 가을이 되어 나름대로의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조용히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해가 뜨고 지는 속도나 달이 뜨고 지는 속도는 여전하다.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도 여전하다. 그런데 왜 인간만이 이렇게 속도전에 뛰어들고 있는 것일까? 농담이지만 의미심장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 있다.
주행속도에 따라서 찬송가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60Km로 달릴 때는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80Km로 높아지면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100Km가 되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드디어 120Km가 되면 ‘주여 나 이제 갑니다’라는 찬송가를 부른다고 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하느님을 빨리 영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똑바로 서서 뛰어야 하는 순간도 있고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으며, 때로는 앉거나 드러누워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쉬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이제 인간은 앉아서 쉬거나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침묵의 시간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외부 환경이 빠르게 변화되면서 인간은 지금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전후좌우를 관조하고 관망하면서 무엇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 쪽으로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나는 바쁘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바뀌고 있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한 현대인들이다.
물살이 급한 냇물 속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물론 물살이 급한 곳만을 찾아다니면서 역류하는 재미를 보는 소수의 몇몇 물고기도 있지만...대체로 물고기는 물결이 완만한 곳에서 종족을 보존하고 성장시키면서 미래를 준비한다. 빌게이츠도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비즈니스"라는 책을 통해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실천만이 살길이라고 비즈니스 세계의 속도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이 결부된 지식은 그렇게 빨리 창출되지 않는다. 정보를 온몸으로 붙잡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첨가시키고 고뇌하면서 자기 것으로 내재화시키는 노력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보 + 지적 고뇌와 창조적 상상력 = 지식」이라는 등식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정보는 컴퓨터의 힘을 빌려 빠른 속도로 유통시킬 수 있지만 지식은 비교적 오랜 고뇌와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고통체험을 통해서만이 창조될 수 있다. 지식은 정보와 다르게 오로지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통해 전수될 수 있다. 따라서 정보는 기민하게 빛의 속도로 공유될 수 있지만 지식은 인간적 접촉을 통해 느리게 공유될 수 있을 뿐이다.
가을에 코스모스 핀 길을 시속 200Km로 달리면 코스모스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질주하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야 한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각도는 그 만큼 줄어든다.
아라비아 숫자 ‘1’에 담겨진 속도와 질주의 광풍 속에서 코스모드는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코스모스와 가을의 날씨, 그리고 코스모스 핀 길이 만들어가는 멋진 풍광은 천천히 걸어가는 한자 ‘一’의 미덕 속에서만 느낄 수 있다. 나중에 느리게 살기 위해서 지금 질주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만 있다. 지금 느리게 살아야 나중에도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속도와 질주는 탈주로 탈바꿈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근대 올림픽 슬로건을 추구하고 지향하고 있다. 인간은 도대체 왜 어디로 그렇게 빨리 달려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우리가 하는 일도 너무 속도전으로 밀어 붙이고 효율만능주의로 치닫다보면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각도와 방향이 더 중요하다. 효율은 극대화되었지만 효과나 성과는 별로 없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검도의 중단 겨눔처럼 멈춰서 있되 다음을 준비하는 치열한 준비도 필요하고, 아예 발을 빼고 어슬렁거리면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때 일에 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달려가는 속도 속에서 잃어버린 일하는 이유와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은 그냥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즐기고 그 속에서 의미심장한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은 끝마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자기연마가 되고 폭넓은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다움을 가꿔나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쉼표가 없으면 느낌표도 찾기 어렵다. 마침표를 찍고 잠시 쉬면서 무엇을 위해서 왜 일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일을 통해 행복해야 되고 행복한 삶을 누려야 건강도 좋아진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일생일대’의 가슴 뛰는 일인가? 아니면 ‘차일피일’ 미루는 일인가? 나는 내 일에 끌리는가? 아니면 일에 끌려가고 있는지? 일에 끌리는 사람은 일에 미친 사람이고, 일에 끌려가는 사람은 일에 지친 사람이다. 미치면 행복해지고, 지치면 피곤해진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 일에 미쳐 있는가? 아니면 피곤한 일에 지쳐 있는가?
[출처][잡코리아 좋은일 연구소 칼럼] 유영만 자문위원 | 당신의 일은 '一'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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